《원고지 위의 마왕》

크로이츠라는 닉네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때문에 “라이트노벨 전문 라이터 ‘크로이츠’”라는 광고문구는 별로 와닿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신에 책 제목에는 무지하게 끌려서 관심 갖게 되었네요. 《원고지 위의 마왕》, 이 무슨 《문학소녀》 맞먹게 서정적인 제목입니까?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요.

주인공 가인은 수백년 전의 마왕으로, 가까스로 부활하였지만 세상이 크게 변화하고 말아 힘을 잃는 건 둘째 치고 부활하자마자 사라질 운명에 처해집니다. 또 다른 주인공 에리스는 작가로,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집안사정 때문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번 소설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에리스는 헤매다 자신의 여학교에 숨어든 처지가 된 마왕 가인과 거래를 하고, 그 눈물에 넘어간(!) 가인은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주는 대신 사라질 처지에 빠진 자기 가상육체를 보존하는데 도움을 받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판타지 세계관이지만, 이 작품만의 특징들이 재밌습니다. 마왕은 태생적으로 마왕이 아니라 강한 열망이 마왕으로 구현된다는 점이라든지, 촉망받는 “사”자 직업에는 의사, 변호사, 마법사가 있다는(있었다는) 점이라든지, 시대적 배경도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산업이 발달하게 된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소재는 에리스와 에리스의 창작활동. 그것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이 아닌 “문화산업”의 일부로서의 창작활동입니다. 시장조사라든지, 작가의 경향성, 상상력, 주제의식. 그리스 신화의 무사이 등 예술활동을 돕는 존재라하면 보통 영감을 떠올리는데, 이 작품에 나온 가인은 전혀 달랐습니다. “근대적”인 방식으로, 에리스와 다른 작가들의 소설들을 비교 분석하여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에리스의 매니저라도 된 걸까요?ㅎㅎ

하지만 주제라고나 할까, “작가가 전하고 싶은 것”은 “이루고자 하는 것”인 것 같네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카토르바슈 학원 엘리트 마법학원이었지만 정부 정책으로 수녀원으로 강제전환됩니다. 애써서 로스쿨 들어갔더니 졸업하기 전에 신학대학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요? 덕분에 그곳 학생들을 목표를 잃게 됩니다. 특히 에리스의 룸메이트인 나나카의 사연은 무지… 현실감 넘치더라고요. 가인은 마왕이 된 목표를 이루기 위해 800년간의 봉인을 견디다 부활하지만, 그 사이 세상이 크게 바뀌어버립니다. 이처럼 작중 인물 대부분(100%던가?)이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절실함이 왠지 최지인 작가님의 과거를 투영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재밌게 봤습니다. 창작활동에 관한 “비소설”적인 면모가 많은 점은 소설로서는 좀 감점일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원고지 위의 마왕》만의 독특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앞으로도 이 독특한 컨셉을 계속 잘 유지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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